2019.10.17

로뎀교회 새벽예배

찬송 139 (128) 오 영원한 내 주 예수

말씀 빌 3;12-21 (3;4-9, 13-14)

 

인류 최초의 염려, 죄책감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많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두가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죄책감에 대하여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자세하게 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죄책감은 무엇일까요?

 

나는 젊은 시절 삼성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술을 먹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술을 먹어야 만이 회사에서 동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또 회사 영업을 위해서도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거래선 손님들과 같이 술대접을 해야 되었습니다.

나는 체질적으로 몸속에서 술을 잘 받아주지를 못했습니다. 술만 먹으면 쉽게 얼굴이 빨개지고 몸에는 고통이 옵니다. 그러다보니 술을 먹다보면 지독한 숙취에 시달립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견딜만합니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견디기 힘든 것은 술을 먹는다는 죄책감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술을 먹는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배웠습니다. 우리 집에는 알코올 중독자는 없었지만 술을 먹으면 횡설수설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먹으면 패가망신한다고 철저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문제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면 삶이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가족까지 생활에 고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술을 마십니까? 회사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기회도 많았습니다. 이때는 모두가 과음을 합니다. 술 먹기 시합이라도 하는 듯 누가 많이 먹느냐 자랑을 합니다. 이러다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차를 몰고 가기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먹어서 속이 쓰리고 머리가 빙빙 도는 상태로 쓰러져 잠들었을까? 왜 변기를 껴안고 토한 뒤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술에 취했을까? 당시에 나는 그런 것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아픔 가운데 다시 회사에 나가야만 하는 고통의 연속이 이어졌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것이 더 큰 죄책감입니다.

 

2. 죄책감의 결과는 염려입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은 죄책감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뒷골목에서 치고 박는 싸움을 하던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댔던가, 하룻밤 여자와 못할 짓을 했던가, 인터넷상에 보지 못할 영상을 봤던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죄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염려입니다. 염려가 죄책감의 원인이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염려를 유발하는 것들에는 바쁜 일정과 비현실적으로 많은 과제와 관계, 그리고 교통체증 같은 것이 포함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깊이 있는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염려에는 이해할 수 없는 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 최초의 염려는 죄책감에 있었습니다.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숨은지라

 

최초의 인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때까지 그들에게는 두려움이나 염려를 느끼는 기색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감출 것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5)

그때 뱀과 선악과가 등장합니다. 최초의 부부는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습니다. 그런 결과 그들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수치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며 허둥지둥 덤불 속으로 숨었습니다.

여기서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수치심 즉 죄책감이 먼저 왔고, 그 다음에 두려움 즉 염려가 왔습니다. 달리는 버스 트럭에 비유하면 죄책감이 운전을 하고 두려움이 짐칸으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의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덤불 속에 숨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악을 다루는 보다 세련된 방식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죄책감을 마비시킵니다. 죄를 부인합니다. 죄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죄를 파묻어버립니다. 우리는 자신을 벌하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매질을 하고 맙니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술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보 같은 짓을 한 게 아니라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나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는 무화과 잎사귀와 덤불과 거짓말 뒤에 숨었습니다. 그 이후 인류가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에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자기가 지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깨끗이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책감을 다룰 건강한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숨고 달아나고 부인하는 불안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된 삶을 사는 것은 몹시 피곤하고 불안을 유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책감은 우리를 비참하고 피로하고 초조하고 늘 화가 나 있고 스트레스로 가득 찬 불안한 사람을 만들고 맙니다.

 

3.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죄책감은 영혼을 시들게 합니다. 은혜는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굳게 붙들었습니다.

바울만큼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신자들을 붙잡아 피를 흘리게 하는 테러리스트였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8;3) 여기서 사울은 바울이 변화되기 전 이름입니다. 게다가 그는 지독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 바울은 평생 자기 구원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구원은 그의 완벽함과 행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바울의 모습을 잘 설명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3;4-6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손에는 피를 묻히고 벽에는 종교적으로 가브리엘 산하 중요한 지도자였음을 붙여 놓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보자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력에 대한 가치가 필요 없었습니다. 더는 자신의 공로와 선행의 가치가 필요 없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하는 여하한 일에 대해서도 자랑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남은 평생을 자신에 대해서는 더 적게 말하고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말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하나님은 바울에게 자기 구원 대신 의를 주셨습니다.

3;9 “이제 나는 율법을 지켜서 내 스스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 의는 어디까지나 믿음에 근거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역)

 

이렇게 말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인 죄책감을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는 죄책감을 마비시키거나 감추거나 부인하거나 다른 것으로 상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죄책감을 그냥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드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미얀마 선교사 여러분!

 

바울이 죄책감에 짓눌린 미얀마 젊은이를 보았다면 무엇이라 말했을까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주님의 자비 안에서 기뻐하라. 용서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으라.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 하거나 의로워지려 하지 말라. 더는 무화과 잎사귀 뒤에 숨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에 스스로를 맡기라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죄의 심각성과 은혜의 무한함을 모두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용기를 싹 틔우는 비옥한 토양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내가 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온통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를 아십니까? 만약 모른다면 여러분은 아직 염려의 근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책감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스로를 정죄하는 잘못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의 새로운 장을 쓰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에 대하여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말 할 수 없다면 끔직한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대속되었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다 지고 가셨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예화 한 토막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지방 공연을 하는 서커스단의 공중곡예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놀랍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공중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모습에 신이 나서 모두가 손뼉을 치며 그들에게 감사한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미얀마도 이런 서커스단이 지방을 순회하며 다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한 번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저서에서 서커스단 공중 곡예사들에게 배운 신뢰에 대한 교훈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비결은 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멀리서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멀리서 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향해 날아갈 때 나는 그냥 팔을 뻗고 그가 나를 붙잡아서 안전하게 반대편으로 데려다 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최악의 실수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 붙잡아 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은 붙잡아 주는 사람을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그가 나를 붙잡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의 팔목을 붙잡는다면 그 사람의 팔목이 부러지거나 내 팔목이 부러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모두 끝장이 나지요. 공중을 나는 사람은 날기만 해야 하고 붙잡아 주는 사람은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공중을 나는 사람은 붙잡아 주는 사람을 믿고 팔을 뻗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구원의 위대한 공중곡예에서 하나님은 붙잡아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공중을 날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팔은 굳세고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잡기 위하여 펴져있습니다. 당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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